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리역 폭발 사고 (문단 편집) == 사고 이후 == [[파일:external/www.sotongsinmun.com/10.jpg]] [youtube(BmPpsHeWPwU)] 사고가 발생하자 당시 한국화약그룹의 현암 [[김종희]] 회장[*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부친이다.]은 즉각 대국민 사과를 하였고 당시 자신의 모든 재산이었던 약 90억 원[*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지금 돈으로는 무려 '''5000억 원'''에 상응한다.]을 모두 피해자와 이재민들을 위해 사용하였다. 그리고 당시 한국화약그룹의 모든 직원들을 피해자들을 위해 헌혈시켰으며 이리역에 직접 파견을 나가게 했다고 한다. 또한 한국화약그룹의 모든 직원들에게 회사에서 지급된 보너스를 다시 반납시켰고 직원들의 11월 급여 중 2%를 재해 기금으로 갹출하였다. 사고 때문에 이리역은 1년 뒤인 1978년 11월에 당시의 위치에서 떨어진 곳에 신설되었다. 이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하여 익산시가 출범하자 역 이름도 [[익산역]]으로 바뀌었는데[* 통합은 1995년 5월 10일, 역명 변경은 9월 1일.] 이리시가 익산시로 바뀌게 된 이유가 이리 하면 이리역 폭발 사고가 연상되기 때문이라 [[카더라 통신|카더라]]. 사실 [[1995년]] 2차 시, 군 통합 당시 통합에 부정적인 분위기가 우세했던 군 지역의 여론을 달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익산군은 익산이란 명칭을 이리에 뺏긴 셈이 되어 버렸다. '익산'이라는 명칭이 붙었던 여러 기관들이 그 이름을 이리에 있는 동종 기관에 넘겨주고 새 이름을 써야 하기도 했고[* 예를 들자면 익산[[우체국]]은 그 명칭을 구 이리우체국에 넘겨주고 함열우체국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든지(현 익산함열우체국), 현재는 없어진 익산[[등기소]]는 이름을 이리등기소에 넘겨주고 북익산등기소로 바뀌었다든지.] 이리시와 익산군은 1994년 1차 시군 통합 당시 익산군 지역의 반대 여론이 과반이었기 때문에 무산된 적이 있다. 폭발 사고의 당사자인 호송원 신 씨는 사고 직후 도주했다가 검거되어 이듬해 2월 법원은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파열죄(개정형법에 따르면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사용죄)를 인정해 징역 10년을 선고받았고[* 오늘날이라면 [[이준석(선장)|부작위에 의한 살인죄]]가 성립할 가능성도 있지만 당시에는 살인의 기준을 굉장히 엄격하게 잡았기 때문에 과실이나 결과적 가중범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살인죄로는 처벌하지 않았다. 당시 사건 경위 및 판결 내용은 1978. 9. 26. 선고 78도1996 판결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대법원은 신 씨에게 "폭약호송"을 선행행위로 인한 보증인지위 인정, "쉽게 진화 가능했음에도 도주한 것"을 폭발물 파열과 같은 작위행위와 동가치하다고 봐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파열죄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1995년 개정형법은 제172조 제1항의 죄의 죄명을 폭발물파열죄에서 폭발성물건파열죄로 바꾸면서 화약을 그 객체에서 제외시켰다. 따라서 개정형법에 의하면 본 사건에서는 부작위에 의한 폭발물사용죄(제119조 제1항)가 성립한다.] 1987년 만기 출소하였다. 시민들은 신 씨로 말미암아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에게 선처를 호소하고 이후 복역하던 신 씨를 면회하는 등 의외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사고로 집을 잃은 이재민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이듬해(1978)에 이리시 최초의 [[주공아파트]]인 모현주공아파트를, 또 이듬해(1979)에 창인주공아파트를 건설했다. 이 중 모현주공1단지는 [[재개발]] 공사로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대림산업]]에서 익산 e-편한세상 아파트가 들어섰다. 창인주공아파트도 재개발 승인이 났다. [[파일:external/image.ohmynews.com/mogija_164927_1%5B202566%5D.jpg]] 이리역 앞 삼남극장. 한편 당시 가수 [[하춘화]]가 이리역 앞 삼남[[극장]]에서 공연 중이었는데 공연을 시작한 지 약 15분 만에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폭발 사고가 일어난 직후 극장 지붕이 무너져내리고 정전이 되어 사방이 암흑 천지였는데 이때 같이 있던 코미디언 [[이주일]]이 본인도 피를 흘리면서[* 무너지는 지붕에서 떨어진 벽돌을 머리에 맞아 [[두개골]]이 함몰된 상태였다. 하춘화는 다행히 단순 타박상 정도에 그쳤다.] 하춘화를 업고 뛰어 가까스로 사고 현장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당시 이리 시내에는 [[종합병원]] 규모의 의료 기관이 없었던지라[* [[원광대학교]]에 의과대학이 설립되고 원광의료원이 개설된 것은 1980년대의 일이다.] 이들은 군산으로 이동하여 도립 의료원에서 응급치료를 받고 나서는 [[서울]]로 올라왔는데, 이때 외부와 연락이 두절된 관계로 언론에서는 한바탕 하춘화가 [[실종]]되었다는 속보를 내보냈고 이 때문에 한때 하춘화의 생사 여부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던 적이 있었다. 사고 다음날 현장에 내려온 [[박정희]] 대통령도 하춘화의 생사 여부와 관련된 보고를 수시로 받았다고 한다. 하춘화의 당시 인기는 요즘의 어지간한 톱가수들 이상인 '국민 가수'급이었다. 하춘화는 6살 때 데뷔했는데 그때부터 스타였고 이 시점에는 이미 데뷔 16주년이었다. 하춘화의 생존이 언론을 통해 공식 확인된 것은 사고 다음날(12일) 저녁이었다. 한편 상경한 이후 한양대 병원에서의 정밀진단 결과 하춘화는 다행히 큰 부상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이주일이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으로 4개월 이상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후 이주일은 '하춘화를 구한 남자'로 유명해져서[* 거기다 이때 이주일 덕에 목숨을 구한 하춘화가 이후 자신의 공연에 사회자로 항시 이주일을 지목하면서 인지도가 더 높아졌다.] 1980년대 들어서 전성기를 맞았다. 사고 당시 한국과 [[이란]]의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이 TV를 통해 방송되고 있었고 폭발이 일어난 후 이 경기를 중계하던 [[한국방송공사|KBS]]에서는 자막으로 이리역 폭발 사고를 속보로 알렸다. [[https://youtu.be/41S1i5a_c1o?t=143|해당 영상]] 그리고 한국 vs 이란전 덕분에 목숨을 건진 학생도 있었는데 사고 직전 자기 방에서 공부를 하던 중 그 학생의 아버지가 [[축구]] 중계를 보고 공부하라며 권유하여 안방으로 건너가 TV를 보던 중 폭발이 일어났고 굉음과 함께 학생의 방 쪽에서 진동이 느껴져 달려나와 보니 이리역에서 날아온 집채만 한 기차 화통이 학생의 방을 덮쳤다고 한다. 만약 그 학생이 계속 공부를 하고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그 학생 입장에서는 천년감수를 한 셈이다. 한편, 사고 당시 군산수산전문학교 기숙사에서 축구를 보고 있던 이리시 출신 학생들은 기숙사 방송을 통해 '본가가 이리인 학생들은 전부 기숙사 앞으로 나오라'는 말을 듣고 운동장으로 나갔고 당직 교사로부터 '이리에서 사고가 크게 났으니 빨리 택시를 타고 집에 가서 가족들 안부를 확인하라'는 설명을 듣게 되었다. 이에 학교에서 마련해 준 택시를 타고 가족들이 있는 이리시로 향하던 중 이리역으로부터 5km 넘게 떨어진 목천포에서부터 깨진 건물 유리창 파편이 도로 위에 깔려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고 택시 바퀴에 유리 조각이 밟히는 소리를 들으며 집으로 향했다고 한다. 사망자 중 역무원이었던 한인석 씨는 부친 역시도 철도공무원이었고 광주역에서 무단횡단하던 어린이를 구하려다 순직한 바 있다. 이후 정부는 유가족에게 재건된 역의 매점운영권을 주었다. 이 사고로 [[최경록]] 교통부장관이 경질되었고 후임에는 [[민병권(1918)|민병권]]이 임명되었다. 씁쓸한 후일담이지만 사고 이후 이리역 주변 아이들 사이에서 '보물찾기'가 유행했다고 한다. 폐허가 된 집[* 사고로부터 7년이 지난 1984년까지 철거되지 않은 채 남겨진 폐가도 있었다.] 근처에서 [[목걸이]]나 [[반지]] 같은 패물을 주워 횡재한 아이들이 나오면서 아이들이 너도나도 보물을 찾겠다고 폐허를 뒤적거렸는데 보물뿐만 아니라 인체의 조각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훗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서도 재현된 풍경이다. 대재해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위험이 진정되자 동네 어르신들이 진두지휘하고 청년들이 군말 없이 따르며 각 가정에서 경황 없는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등 혼란이 빠르게 수습되었다. 임시 대피소 건설을 위해 군은 물론이고 인근 [[공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징발'''하여 전기 공사 등을 시켰다고 한다. [[익산역]]에는 이 사고의 희생자 추모비가 세워졌다. 2017년 11월 11일 이리역 폭발 당시 [[군의관]]으로서 현장에 달려간 [[윤장현]](전 [[광주광역시장]])이 '이리역 폭발사고 40주년 추모행사'에서 [[익산]]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http://naver.me/xk4mDgpZ|#]] 당시 윤장현은 다급한 마음에 파견 명령도 받지 않은 채 인원과 장비를 챙겨서 독단적으로 이리시에 가서 의료 활동을 하였다. 법적으로는 [[탈영]]이지만 [[서종철]] 국방부장관이 훌륭한 초동 출동이라며 크게 칭찬하고 격려를 받아서 넘어갈 수 있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